뚜언(Tuấn)은 베트남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밝게 웃고, 집에서 함께 사는 동생들을 돌보며 꿈을 키웠다.
그 꿈은
“부모님과 동생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
이었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먼 해외로 나가는 것은 뚜언에게 선택 아닌 선택이었다.
뚜언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와 여러 소개를 거쳐 한국에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고, 한국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기에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타국에서 겪게 될 외로움과 언어 장벽, 문화적 차이에 대한 두려움은 숨길 수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뚜언은 지방 소도시의 작은 공장에 배정되었다.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주말에도 잔업을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는 그를 고용해준 사장님과 한국인 선배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부지런히 일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공장에 가고, 퇴근 후에는 간단한 식사를 한 뒤 피곤해 몸을 눕기 바빴다. 일주일에 한 번쯤 쉬는 날이 오면, 남는 시간 대부분을 베트남에 있는 가족에게 연락하는 데 썼다.
그러나 처음엔 견딜 만했던 삶이 조금씩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점점 가혹해지는 작업 환경, 계속되는 잔업과 임금 체불,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겪는 작은 차별들, 그리고 복잡한 비자 및 체류 문제까지. 무엇보다도 고향의 가족에게 매달 송금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졌고, 본국에서 부모님이 병원비 부담으로 힘들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뚜언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뚜언은 새벽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공장 앞 담벼락에 걸터앉아 베트남에 있는 가족의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아이처럼 해맑은 동생들, 고단한 표정의 부모님.
‘조금만 더 힘내면, 그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하며 버텼다.
하지만 공장에서의 처우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한국어를 조금씩 배워가도 회사와 사장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사장은 기계가 고장 나거나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뚜언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묻곤 했다. 일부 동료들은
“네가 한국말을 제대로 못해서 생긴 문제”
라며 뚜언을 탓했다. 깊어진 고립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 뚜언은 정신적으로 한계에 가까워졌다.
어느 비 오는 가을날 저녁, 늦은 시간에도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장에서 주야 교대 근무를 하던 뚜언은 잠시 기숙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부는 옥상 난간에 서서 흠뻑 젖어가며, 그는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말, 그리고 자신이 많이 부족했다는 자책의 말이 삐뚤빼뚤한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뒤섞여 적혔다.
그날 밤, 뚜언은 옥상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등졌다. 기숙사의 작은 옥상 위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꺼져가는 도시의 불빛들이었다.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운 그 하늘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그의 머릿속에는 고향 집 앞마당에서 뛰어놀던 동생들의 웃음소리가 아른거렸을 것이다.
뚜언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방에서는 낡은 휴대전화가 발견되었다. 화면에는 그가 가족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돈을 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문장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찍힌 가족들의 사진.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며 웃는 부모님, 학교에서 장난치는 동생들.
경찰과 노동청에서 해당 사건을 조사했지만, 과로와 임금 체불 등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진술만이 얽혀 있을 뿐이었다. 사업주 측은
“개인적인 우울증 때문이었다”
라며 책임을 부인했고, 공장 동료들은
“외국인 노동자의 어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며 고개를 숙였다. 뚜언이 남긴 메모 역시 정확한 원인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뚜언의 사망 소식은 지역 신문의 작은 기사로 실렸고, 공장 인근에서는 이주 노동자 몇몇이 모여 작은 추모를 했다. 그곳에는 뚜언과 같은 베트남 출신 노동자들, 그리고 다른 국적의 노동자들도 함께했다. 각자 자신의 모국어로 추모의 말을 전하며, 더욱 안전하고 인권이 보장된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누었다.
뚜언의 가족은 그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셔가기 위해 여러 절차를 밟아야 했다. 복잡한 서류 작업과 비용 문제는 그들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래도 현지 지원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뚜언은 베트남의 작은 마을로 돌아갔다. 부디 그곳에서만큼은 고단했던 기억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했던 따뜻한 시간들로 기억되길 많은 이들이 바랐다.
이 이야기는 뚜언이라는 한 인물의 극단적 선택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과로, 임금 체불, 언어와 문화 장벽, 차별 등)를 비추어봅니다. 이들의 고충은 단순히 ‘개인의 힘든 상황’으로만 치부될 수 없으며, 제대로 된 제도와 사회적 보호망이 갖추어져야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이주노동자가 있다면, 제도적 도움과 심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단체나 기관이 있는지 함께 찾아보거나, 작은 관심이라도 전해주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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